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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8 (수)

[항일전쟁 80주년]"중국이 기억하는 항일전쟁의 10대 전투, 그날의 함성과 눈물"

"중국 현대사를 바꾼 역사적 전투들, 그 의미와 오늘날의 해석"

화면 캡처 2025-04-05 140821.jpg

 

[더지엠뉴스] 항일전쟁(抗日战争)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중 하나로,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중국의 역사적 투쟁이다. 2025년은 항일전쟁 80주년이 되는 해로, 중국은 이 전쟁을 통해 국민의 단결과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중국 관영 매체와 정부는 항일전쟁의 주요 전투를 통해 역사 교육과 국민 단합을 독려하고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중국이 기억하는 대표적인 10대 전투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의미와 오늘날 중국 사회에서의 해석을 살펴본다.

 

상하이 전투(淞沪会战, Songhu Battle)

상하이 전투는 1937년 8월 13일부터 11월 12일까지 약 3개월 동안 지속된 대규모 전투로, 중국군과 일본군이 상하이(上海, Shanghai) 지역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싸웠다. 상하이는 중국의 경제적 중심지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하여 중국을 압박하려 했고, 중국군은 이를 저지하려 했다.

처음에는 중국군이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내며 강한 저항을 보였으나, 일본군은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 강력한 공세를 펼쳤다. 특히 상하이 외곽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도심 전투로 이어지며 민간인 피해도 막대했다.

일본군의 현대적 무기와 강력한 화력에 밀린 중국군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상하이 전투를 통해 중국 국민의 항일 의지가 크게 고취됐다. 이 전투는 항일전쟁 초기의 중요한 저항 사례로 기억되며, 중국의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상징적 전투로 평가된다.


타이얼좡 전투(台儿庄战役, Taierzhuang Battle)

타이얼좡 전투는 1938년 3월부터 4월까지 산둥성(山东省, Shandong) 타이얼좡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로, 중국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중요한 대승이다. 이 전투는 일본군이 중원 지역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국민혁명군이 강력히 맞선 사례로, 중국군은 방어와 반격을 반복하며 전투를 이어갔다.

특히 국민당군과 공산당 팔로군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면서, 중국군 내부에서도 협력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됐다. 일본군은 타이얼좡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중국군의 사기 또한 크게 고무됐다. 이 전투의 승리는 당시 침체되어 있던 항일 분위기를 되살리고, 일본군의 무적 신화를 깨뜨린 상징적 사건으로 남았다.

 

화면 캡처 2025-04-05 140311.jpg

 

우한 전투(武汉会战, Wuhan Battle)

1938년 6월부터 10월까지 약 4개월간 이어진 우한 전투는 항일전쟁 초기 최대 규모 전투 중 하나로, 중국군과 일본군이 중부 지역 우한(武汉, Wuhan)을 두고 격돌했다. 우한은 당시 중화민국 정부의 군사 중심지로, 이곳을 장악하면 중국의 항전 의지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한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중국군은 우한 방어를 위해 약 1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도심 곳곳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항공기와 전차를 동원하여 우한을 포위하려 했으나,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격이 쉽지 않았다.

결국 우한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지만, 이 전투를 통해 일본군의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고, 중국군은 일시적으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확보했다.


창사 전투(长沙会战, Changsha Battle)

창사 전투는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벌어진 장기 전투로, 후난성(湖南省, Hunan) 창사(长沙, Changsha) 지역을 둘러싸고 중국군과 일본군이 대치했다. 특히 1941년 제3차 창사 전투에서는 중국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며 대승을 거두었다.

중국군은 지형을 활용한 방어 전략과 치열한 시가전을 통해 일본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창사 전투는 일본군의 중남부 침공을 막아낸 중요한 승리로 평가받으며, 중국 정부는 이를 일제 침략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매년 창사에서는 이 전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며,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는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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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이위안 전투(绥远抗战, Suiyuan Battle)

1936년 내몽골(内蒙古, Inner Mongolia) 쑤이위안(绥远, Suiyuan)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중국군이 일본이 지원하는 몽골군을 격파한 사건이다. 이 전투는 일본이 내몽골을 통해 중국 북부로 침략하려는 계획을 저지한 중요한 승리였다.

중국군은 내몽골 지역에서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 방어에 성공했으며, 이로 인해 일본군은 북방 확장 전략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쑤이위안 전투는 중국이 북부 영토를 수호한 사례로 남았으며, 특히 민족 자결과 국토 수호 정신을 강조하는 중요한 전투로 기념되고 있다.

 

핑싱관 대첩(平型关大捷, Pingxingguan Victory)

1937년 9월 25일, 산시성(山西省, Shanxi) 핑싱관(平型关, Pingxingguan)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첫 대승으로 유명하다. 항일전쟁 초기, 팔로군 제115사단은 일본군 제5사단을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팔로군은 산악 지형을 활용하여 일본군 보급 부대를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일본군의 보급 차량과 병력을 집중 타격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수백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군수 물자를 노획하여 전력을 강화했다.

핑싱관 대첩은 중국 공산당이 항일전에서 실질적 전과를 올린 사례로, 항일전쟁 초기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전투로 평가된다. 중국 정부는 이 승리를 통해 공산당의 지도력을 강조하며,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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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방어전(南京保卫战, Nanjing Defense)

1937년 12월, 일본군은 난징(南京, Nanjing)을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난징은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로,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의 군사적, 정치적 중심을 무너뜨리려 했다. 중국군은 수도를 사수하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일본군의 압도적 화력과 군사력에 밀려 방어선이 붕괴됐다.

난징이 함락된 후 일본군은 대규모 학살과 약탈을 저질렀고, 이 사건은 '난징대학살'로 불리며 중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됐다.

난징 방어전은 중국이 군사적으로 패배했지만, 난징대학살을 통해 일제의 잔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중국 정부는 이 사건을 항일 정신과 민족적 단결의 교훈으로 삼고 있으며, 매년 추모 행사를 통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광저우 전투(广州战役, Guangzhou Battle)

1938년 10월, 일본군은 남방으로 진격하여 광둥성(广东省, Guangdong) 광저우(广州, Guangzhou)를 점령하려 했다. 광저우는 남부 중국의 중요한 항구 도시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중국군은 도시 방어를 위해 철저히 대비했지만, 일본군의 해상과 공중 지원을 받은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광저우 전투는 남부 전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고, 이후 중국군은 남부 지역의 방어 전략을 재정비하게 됐다.

일본군이 광저우를 점령하면서 중국군은 대대적인 후퇴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으나, 항일 의지를 잃지 않고 남방 전선에서의 저항을 이어갔다. 현재 광저우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는 유적지와 기념관이 있어, 항일전쟁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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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위안 전투(太原会战, Taiyuan Battle)

1937년 9월부터 11월까지, 산시성 타이위안(太原, Taiyuan)에서 벌어진 전투로, 중국군과 일본군이 북중국의 군사 요충지를 두고 격돌했다. 타이위안은 산시성의 중심 도시로, 중국군은 산악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이 함께 협력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일본군의 전차와 공중 지원에 의해 방어선이 무너졌다. 타이위안이 함락됨으로써 일본군은 북중국 지역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중국군의 협력과 저항 의지를 보여준 사례로 남아 있으며, 타이위안 지역의 항일 정신을 상징하는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타이위안 전투의 실패를 계기로 중국군은 산악 방어전과 게릴라 전술을 강화하며, 이후의 전투에서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루거우차오 사건(卢沟桥事变, Lugouqiao Incident)

1937년 7월 7일, 베이징(北京, Beijing) 근교의 루거우차오(卢沟桥, Lugouqiao)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이 항일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일본군이 교량을 점령하려 시도하면서 중국군과 교전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전면전이 시작됐다.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일본군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북중국 지역을 집중 공격하며, 중국군은 대규모 방어전으로 맞섰다.

이 사건은 중국 전역에서 항일의 불씨를 지폈으며, 중국인들은 "7·7사변"으로 기억하며 민족적 저항 정신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현재 루거우차오에는 항일전쟁 기념관이 세워져 있으며, 사건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매년 열린다.


중국이 강조하는 항일전쟁의 주요 전투는 중국 국민에게 항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민족적 단결을 강조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전투에서의 승리와 저항을 통해 중국은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며, 전쟁의 교훈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있다. 항일전쟁 80주년을 맞아, 중국은 이러한 전투의 역사를 기념하며 평화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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