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의 적 앞에 섰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투쟁사

[더지엠뉴스]항일전쟁의 기억은 단지 중국의 역사로만 남지 않는다.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수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땅을 무대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그들은 단지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사들이 아니었다.
중국 국민들과 함께, 공동의 적을 향해 총을 들고 싸운 동지들이었다.
이들의 이름과 흔적은 오늘날 중국의 전쟁기념관과 역사자료 곳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김구(金九, Jīnjǐu) 선생이다.
그는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중국 정부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충칭(重庆, Chóngqìng)으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군사조직 창설을 추진했다.
이 결과물이 바로 한국광복군이다.
광복군은 중국 육군참모학교에서 정규 군사교육을 받고 편성되었으며, 중국군과 공동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실제 전투에도 참여했다.
지청천(池靑天, Chíqīngtiān) 장군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하며, 중국군과의 연대 작전에 중심에 있었다.
그는 후난(湖南, Húnán)과 쓰촨(四川, Sìchuān)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 전선을 구축했고,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의 보급선을 교란하는 임무를 지휘했다.
중국의 관영매체는 지청천을 “중국 국민당 정규군의 협력자이자, 조선 독립운동의 핵심 군사 지도자”로 소개했다.
윤봉길(尹奉吉, Yǔnfèngjí)의 활약은 중국 전역에 충격과 감동을 안긴 사건이었다.
1932년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의거는 단지 일본군 지휘관을 처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장제스(蒋介石, Jiǎngjièshí) 총통은 이 의거 직후 “조선 청년 하나가 중화민족 전체의 사기를 일으켰다”고 말했으며, 이후 중국의 군사·외교적 지도자들 사이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이 크게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중국의 지원은 정치적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에게 무기, 군복, 훈련소, 작전계획까지 제공하며
형식상 동맹 이상의 실질적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충칭 시절에는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간의 통합을 위한 조정도 중국이 적극 나섰다.
중국 땅에서 활동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단순한 망명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 내부의 전투에 실질적으로 참여했고, 정보공작과 선전활동까지 수행했다.
이범석, 김원봉, 박용만 등은 각기 다른 노선을 걸었지만
중국 정부와 연대해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에도 중국의 공식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다.
충칭에는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 청사가 보존되어 있고,
상하이에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을 기리는 기념관이 운영 중이다.
최근에는 중국 중앙방송(CCTV)이 ‘항일의 동지들’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도 했다.
한중 양국은 항일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진정한 우정을 확인한 경험이 있다.
그 연대는 총과 폭탄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라는 가치 아래에서 함께 흘린 피로 맺어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공동의 기억을 되새기며, 동아시아의 평화와 미래를 함께 설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