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 80주년] 이름 없이 싸운 그녀들…중국이 기억하는 ‘여전사’

  • 등록 2025.05.06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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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의 또 다른 전선, 여성들은 어떻게 싸웠고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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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지엠뉴스] 2025년, 중국은 항일전쟁 승리 80주년을 맞아 전국적인 기념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체성을 구축한 주요 역사로서 항일전쟁은 매년 반복되는 기념일이지만, 올해는 특히 여성들의 투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전 인민 항전’이라는 역사 서사 속에서, 지금껏 그림자에 가려졌던 여성 전사들의 존재가 중국 전역에서 다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언론은 최근 항일전쟁 당시 여성들이 수행했던 전투, 정보, 후방지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발굴해 소개하고 있다.

런민르바오(人民日报)는 지난달 특별 기획면을 통해 “총을 든 여인들, 붉은 피로 적어낸 역사”라는 제목으로 여성 항일투사 12명의 삶을 조명했다.

여기에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한 빨치산 여성들, 상하이에서 첩보 임무를 수행한 여성 정보원, 남부 후방에서 부상병을 돌본 의료 여성들의 기록이 총망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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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헤이룽장(黑龙江, Heilongjiang)과 지린(吉林, Jilin) 지역을 무대로 결성된 ‘둥베이항일녀전사대(东北抗日女战士队)’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산림지대를 은신처 삼아 일본군 수송로를 차단하고, 기차를 습격하고, 적 군수품을 빼돌리는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총기 사용법, 게릴라 전술, 심지어 전선 지휘까지 익힌 이 여성들은 단순한 보조 병력이 아닌 정규 전투 인력으로 기능했다.


전국 각지의 기념관과 역사관도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산시(陕西, Shaanxi)성 옌안(延安, Yan'an) 항일기념관은 ‘여성 전사 특별전’을 열고, 실존 인물 리우후이잉(刘慧英)의 군복과 일기, 전투 명령문을 전시했다.

그녀는 1938년 화베이(华北, Huabei)에서 일본군의 진지를 폭파하고 체포된 뒤에도 끝까지 당 소속 조직을 밝히지 않아 고문으로 순국했다.

이 일기는 사후 그녀의 유품 속에서 발견됐으며, 지금은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의 ‘혁명열사 교재’에도 수록돼 있다.


이처럼 무장 투쟁에 직접 나선 여성 외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첩보, 통신, 의료, 보급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특히 장쑤(江苏, Jiangsu)성과 저장(浙江, Zhejiang)성 일대에서는 여성들이 일본군의 진격을 예측하고 전령 역할을 수행하며, 수시로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이름은 대부분 기록되지 않았고, ‘양민’으로만 분류돼 있었다.

최근에는 지방 정부 차원에서 구술 자료를 모아 이들 익명의 전사들에게도 이름을 부여하고 공적비를 건립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현대 중국의 문화 콘텐츠 역시 여성 전사의 재조명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2024년 CCTV 다큐멘터리 ‘붉은 명령의 전사들’은 실제 여성 통신병들의 삶을 재구성해 큰 화제를 모았고, 전국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드라마 ‘보이지 않는 전사들(隐形战士)’은 항일기지 내 첩보 활동에 투입된 여성 공산당원들의 이야기를 픽션과 다큐의 경계에서 풀어내며 젊은 세대에 큰 인상을 남겼다.

국가광전총국은 해당 콘텐츠를 “역사적 진실에 근거한 올바른 애국주의 교육자료”라고 평가하며, 전국 방영을 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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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역사 재조명에 그치지 않고, 중국 사회의 현재적 과제와도 연결된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는 “여성 전사의 기억은 단지 과거의 무용담이 아닌, 오늘날 중화민족단결과 양성평등, 민족혼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산당이 항일전쟁을 '민중 전체의 전쟁'으로 기억하려는 의지 속에서 여성은 새로운 정치적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대 여성사연구소의 황리핑(黄丽萍) 교수는 “항일전쟁 속 여성의 기여는 사실 역사 전체를 다시 쓰는 계기”라며 “중국공산당의 서사 구조 속에서 여성은 단순한 조력자에서 주체로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의 애국주의 서사는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적이었으나, 지금은 남녀가 함께 쌓아올린 항전의 정신을 재구성하려는 흐름이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이 재구성하는 항일전쟁의 기억 속에는 이제 여성들의 목소리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름 없이 사라졌던 이들의 투쟁은 80년 만에 다시 기록되고 있으며, 그 희생은 오늘날 중화민족의 자존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항일전쟁 80주년은 단지 승리를 기념하는 시간이 아니라, 잊힌 존재들을 불러내는 새로운 시작이 되고 있다.




김대명 기자 daemyong709@theg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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